향긋한 흙내 나는 이야기로 우리의 황폐화된 미각을 돌아보게 하는 요리 에세이의 명저. 요리 만화의 바이블 『맛의 달인』에서 주인공 야마오카 지로가 “지금, 유일하게 읽을 가치가 있는 음식 책”이라고 극찬한 도서다. 초판이 발행(1978)된 지 40년이 넘은 지금까지 사라져 가는 삶의 방식과 오랜 밥상을 떠올리게 하며 따뜻한 위로와 감동을 준다.
아홉 살에 교토의 선종 사원에 맡겨져 생활하며 자연스레 요리를 배운 중년의 소설가가 가루이자와의 산장에서 직접 농사짓고 살며 십대 때 배운 요리를 재연한 열두 달의 기록. 밭에서 기른 제철 식재료를 정성껏 조리해 계절의 맛을 담고, 검소하고 소박하게 상을 차리는 게 핵심이다. 요리 이야기의 행간에는 인생의 고비를 넘기며 깨달은 삶과 음식에 대한 철학, 즉 요리도 삶도 힘써 나아가는[精進]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차분하면서도 품격 있는 문장으로 서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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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친님의 블로그에서 알게 되어 읽게 된 책입니다.
저자인 미즈카미 츠토무(水上勉)는 1919년 출생 2004년 사망한 작가로, 9세에 교토의 임제종 사원인 즈이슌인瑞春院, 13세부터는 마찬가지로 임제종 사원인 토지인等持院에서 지내는데 16~18세 동안 부엌일을 맡았습니다. 이 때 배운 정진요리(사찰요리)를 이후 카루이자와의 산장에 살면서 재연하는 게 이 책이죠.
2022년에는 영화화도 되었네요. 그 해 여름에 누적판매량 27만부.
참고로 즈이슌인을 배경으로 쓴 추리소설 기러기의 절雁の寺로 1961년 나오키상을 탔습니다. 약간 흥미는 있는데 이 작가의 책이 한국에 번역된 것은 이 ‘흙을 먹는 나날’이 처음. 기러기의 절도 원서를 사 볼까..?
이미지는 한국어판을 올렸습니다만 제가 읽은 것은 원서.
잘 모르는 작가니까 평소라면 일단 도서관에서 빌려읽어볼텐데, 카와카미 히로미 책을 읽을 때도 느끼지만 요리가 주제인 수필을 읽을 때면 제가 모르는 단어가 많이 나와서 나름 공부가 됩니다.
특히 이 책의 경우 식물 이름이 주일텐데 한국에 없는 식물이면 애매하기도 하고 아예 원서로 읽자, 하고.
예상대로(?) 일어로 뭐라고 하는지 잘 몰랐던 식용식물 이름이 간간이 나오는데 거기에 더해 이 책이 1978년작이라서 식물 이름이 아니더라도 가끔 지금 주로 쓰는 어휘랑 다르다 싶은 때도 있어 나름 신선합니다. (예를 들어 히라가나로 けしき라고 써 있는데 경치가 아니라 기색이었다거나, 첫물을 始め가 아니라 走り로 썼다거나)
소설이라면 이런 것들이 독서 흐름을 왕왕 끊어놓아서 불편했을텐데, 이 책은 느긋이 읽게 만들어주니 오히려 장점이랄까.
책 자체도 한 달을 테마로 총 12개의 챕터로 나누어있고, 거의 대부분의 홀수 페이지가 사진.
작가의 문체가 원래 거의 개행을 안 하는 타입인 건지, 처음 책을 폈을 때는 개행이 거의 없이 글자가 빼곡이 들어차서 속으로 우와 싶었는데 막상 넘기기 시작하니까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서 적당히 천천히 읽게 되었습니다.
원래도 요리 에세이는 좋아하는 편인데 이 책은 요리뿐만이 아니라 흙과 식물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나와서 더 좋았던 듯.
중간중간 도겐道元의 저서에서 자연과 식물과 내 마음가짐에 대한 설교? 같은 인용도 많이 하는데 이 쪽은 일어로 읽어도 못 알아먹으니 대충 패스.
(임제종 사찰에 있었지만 일본 조동종의 시조인 도겐만 인용하는 것도 아이러니.. 하지만 원래 자연에 대해 겸허하게 살자는 게 조동종의 모토이고 임제종은 권력층 대상으로 하는 면이 있었으니까 당연한가?)
이혜미 씨의 ‘식탁 위의 고백들’을 읽었을 때도 흙에서 자라나 도마 위에 올라오는 식물이라는 물성에 집중한 문장이 좋았는데 그런 점에서 이 책도 마찬가지.
(이혜미 씨는 문장이 워낙 날카로워서 인상적이었는데 원래 시인이라는 것을 알고 납득함. 근데 트위터에만 말하고 포스팅을 안 했군)
오랜만에 즐겁게 읽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 두 권이랑 비슷한 책이 더 없나 싶네요…
추가>
1. 2021년 연초에 일본어 물고기 한자 정리 타래를 트위터에 전개한 적이 있는데
덕분에 어제부터 트위터에 일본어 식용식물 단어 정리 타래를 시작함. 너무 빤히 아는 건 빼고 몰랐던/헷갈리는/최근에 안 단어만 올릴 거라 오래 못 갈 거 같지만.
2. 즈이슌인 토지인 둘 다 교토에 있는데 전자는 일반 공개를 하지 않는 절이네요.. 토지인은 언제 들러봐야지(어차피 相国寺를 아직 안 가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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