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하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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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병으로 죽지 않는 세계, 일정 나이가 되면 자기 몸 안에 ‘워치미’라는 소프트웨어를 심어 체내의 항상성을 실시간 감시한다. ‘워치미’는 개인용 의약품 정제 시스템과 연동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이상이 생기면 예방을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아무도 병들지 않고, 싸움이 없는 세계. 즉 완벽한 ‘하모니’가 구현된 세계에서 ‘바이가먼트’의 통치 아래 유토피아는 이미 실현되었다. 최상의 ‘하모니’를 이룬 세계에서 아직 ‘워치미’를 몸 속에 넣지 않은 세 명의 소녀-키리에 투안, 미히에 미야하, 레이카도 키안-는 미야하의 주도 아래 자살을 시도한다. 그로부터 13년 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6,528명의 사람들이 전세계에서 동시에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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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제국’의 극장판 애니(한국에는 3월에 개봉한다고)가 타임라인에서 화제가 되어서 강제대여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존 왓슨을 주인공으로 하는 패스티쉬 소설이라 화제가 된 거긴 한데, 하여간 읽고서의 감상은 ‘프롤로그가 제일 재미있다’.
죽은 자의 제국은 SF 작가였던 이토 케이카쿠가 프롤로그까지만 쓰고 폐암으로 사망한 것을, 친구인 엔죠 토우가 뒤를 쓴 작품입니다. 하여간 본편은 기대만큼은 재미없고 프롤로그만 재미있었기에, 이 작가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져서 유작들을 찾아 읽기 시작한 것.

유작이라고는 해도 2007년 학살기관으로 데뷔해서 2008년 12월 세번째 장편인 하모니 <harmony/>를 발표하고, 2009년 3월에 사망. 2번째 장편은 메탈 기어 솔리드의 노벨라이즈였기에 게임을 안 한 저로서는 손을 대기 애매해서, 결국 학살기관이랑 하모니(한국에는 세기말 하모니라고 들어옴) 두 권만 읽으면 끝. 둘 다 한국에 라이센스 들어왔고요, 보니까 둘 다 극장판 애니 만들어진 모양..

학살기관도 나쁘진 않았지만(미국의 특수부대원이 어떤 작전을 쫓다가 인류의 비밀?과 맞닿아있는 커다란 비밀에 부딪치게 된다는 흐름은 제노사이드를 떠올리게 했음) 그렇게까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이 ‘하모니’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학살기관과 세계관이 이어지는 SF 디스토피아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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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기관 결말의 ‘대재앙(핵전쟁)’ 이후, 방사능에 의한 절멸의 위기를 극복한 인류는 그 반동으로 ‘건강’을 가장 큰 가치로 삼게 되었습니다. 과학기술도 의료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해, 이 시대의 인간은 성인이 되면 신체에 ‘워치미’라는 소프트웨어를 장착해, 실시간으로 중앙서버와 연동되어 항상성이 약간만 흔들려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된 것. 이로써 인류는 감기 등의 흔한 질병마저도 겪지 않게 되었고, 노화로 인한 것 외엔 죽음이라는 것을 마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국가라는 개념은 희미해지고 워치미를 기준으로 한 몇 개의 바이가먼트라는 집단으로 구성되고, 정치세력에게 집중되었던 권력도 바이가먼트를 중심으로 분산된 유토피아가 구현된 것.

그러나 한편으로 개개인의 신체는 개인의 것이 아닌 공공재산이라는 사고가 팽배해지고,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건강을 약간 해치면서 누릴 수 있었던 기호품-술과 담배-은 사회악으로 규정되어 박멸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칼로리 음식이라든가도 마음대로 못 먹고, 식단마저도 바이가먼트의 전문가들이 지정하기 때문에 다들 비슷비슷한 건강한 체형을 유지하는 강박적인 사회. 또 너무나 발달한 네트워크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개인정보가(직업과 건강 관리 상태 등) 그대로 노출되는, <멋진 신세계>를 계승하는 디스토피아.

주인공 투안은 이런 환경이 너무 싫어서, 소녀 시절 두 명의 친구들과 같이 거식으로 자살하려 한 과거가 있는 28세 여성. 당시 셋 중 리더였던 소녀만 자살에 성공하고, 나머지 한 명은 성장해서 바이가먼트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반면 주인공은 자신이 몸 담은 세계를 지겨워하면서도 완전히 벗어나진 못하고, 국제적인 기관에 들어가 워치미의 감시가 소홀한 분쟁지역으로 파견되어 몰래 술이나 담배를 밀반입해서 즐기는 생활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상사에게 밀반입한 사실을 들키고, 일본으로 강제송환당한 주인공은 옛날 친구-자살시도했다가 살아남은- 키안과 만나는데, 순종적인 성인일 줄만 알았던 키안이 갑자기 눈 앞에서 목을 긋고 자살사고, 그와 동일한 시간에 세계에서 6528명의 사람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투안은 친구가 죽은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조사에 나서는데…

…라는 줄거리. 사실 첫 인상은 신죠 카즈마의 단편에서 보았던, 사고나 감정 등을 선택적으로 중앙 네트워크에 연결한다는 설정인가, 별로려나… 라는 느낌이었지만 이 소설은 건강 상태만 접속되어 있습니다. 감정 등이 html 태그처럼 표현되어서 초반에 좀 헷갈렸는데 거기까지 접속/공유한 것은 아니었고요. 하여간 정보 처리 기술이 발달하면서 개인 정보 보호가 힘들어진 세계, 의료 기술이 발달했으나 그에 대한 반작용도 심한 디스토피아.. 라는 설정 자체도 저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스케일이 더 커집니다.

죽은 자의 제국, 학살기관에서도 나왔던, ‘뇌에 특정 시그널을 주입함으로써 행동이나 감정 등을 컨트롤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소재가 언급되고,
이런 유토피아가 실현되었는데 왜 청소년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그렇게 자살을 하며, 투안처럼 일부러 정보 공유의 회색 지대를 찾아가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나오는가? 워치미가 모든 사람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는 거라면 전인류의 행복을 구현하기 위해 인류가 다음으로 진화해야 할 길은 어디인가, 라는 명제가 등장합니다.

더 이상은 스포니까 말 안 하지만, 거기에 대해 작가가 답을 내놓으면서 작품이 끝나는데.. 이게 인상적이서.. 작가 후기 대신 실린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 ‘진화의 끝’이 현재의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한계라고 말합니다.
겨우 데뷔 2년차, 두번째 오리지널 작품에서 내놓은 이 ‘진화의 끝’도 대단했는데 그 너머를 모색중이라니.. 만약 이 작가가 살아있었으면, 작가가 그 너머를 찾아내기를 기대하면서 신작을 꼬박꼬박 챙겨읽었을텐데 안타까웠구요. 비슷한 테마의 다른 작품이 없는가 찾아보고 싶어지는데 제가 SF는 잘 모르는지라.. 인터뷰에서 작가가 참고문헌으로 언급한 작품들이라도 읽어봐야 하나 싶습니다.

p.s: (이하 네타바레)
그러고보면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2부에서도 ‘가이아’가 비슷한 경우지요. 인간을 포함한 가이아의 모든 물체-무생물까지도-가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설정. 물론 개체마다 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는 되어있지만, 사실 파운데이션에서는 어디까지가 개체로서의 의식이고 어디까지가 집단으로서의 의식인지 명확한 제시는 안 되어 있고, 실제로도 주인공이랑 그 문제로 티격태격합니다만.. 3부를 아직 안 읽어서 모르겠는데 이 쪽에는 그에 대한 해답이 있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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