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국

하나코는 오랜만에 고향 야쿠무라 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어린 시절 단짝 사요리가 이미 18년 전에 죽었으며, 사요리의 어머니 데루코가 딸을 위해, 88개의 절을 망자의 나이만큼 거꾸로 순례해 죽은 자를 불러내는 금기의 의식을 치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 짝사랑이었던 후미야와 재회한 하나코는 자연스레 사랑에 빠지지만, 두 사람 주위를 끈질기게 맴도는 섬쯕한 기운 때문에 불안해한다. 데루코의 의식이 완성될 무렵, 마을에는 폭풍우가 몰아닥치고, 후미야와 하나코는 신의 골짜기로 향하는데…….

*

2003년. 본과 1학년 1학기였던가, 의대 본과 4년 중 가장 유급율이 높은 학기의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 그래도 아직 체력이 남았던 우리들은, 동기 언니의 ‘귀신 영화를 보고 싶다’라는 말에 비디오 가게에서 영화를 하나 빌렸습니다. 그게 이 ‘사국(死國)’.

영화 스토리는 소설과 거의 동일. 주인공이 오랜만에 시코쿠의 고향에 돌아가, 어릴 적 단짝이었던 사요리가 18년전 물에 빠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동창회에서 사요리의 남자친구였던 후미야를 알게 되어 사랑에 빠지고요.

한편 대대로 영매사(원서에서 뭐라고 하는진 모르지만) 같은 일을 하고 있던 모계 가문의 대를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 사요리의 어머니는 시코쿠 순례(88개의 절을 시계 방향으로 도는)를 반대쪽으로 돌아 죽은 자를 회생시키는 의식을 시행합니다.

의식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사요리의 기운을 느끼게 되는 주인공과 후미야. 부활하려는 사요리는 아직도 후미야를 사랑하고 있어서, 둘 사이를 떼어놓으려 합니다. 과연 결말은?

….라는 줄거리. 일본 영상을 자막없이 본 지 1년이 채 안 된 시기였던지라, 등장인물들이 죄다 시코쿠 방언(정확히는 고치현)으로 떠들어서 내내 ???하면서 봤던 기억과,
사요리 역을 맡았던 쿠리야마 치아키가 인상에 남았던 것과(마지막 연못 허우적신은 시험 전날에 찍고 바로 감기로 앓아누웠댔던가 어쨌던가),
일본인의 죽음에 대한 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저는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같이 봤던 무리들은 죄다 일반인이라 감상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요. 링 같은 것을 기대했던 거 같은데(다들 아무 말도 없었다..). 게다가 베드신도 있었던지라 22~23세 여자 셋과 22세 남자 한 명이 함께 보기에도 좀 뭣했고.
아, 여자 둘 사이에서 흔들리는 남주가 죽일 놈이라는 것과, 사요리의 부활을 막으려는 조직들이 끝내 한 일이 뭐야? 라는 감상이 있었지만(이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

이 시코쿠 순례를 반대로 돌면 죽은 자를 불러들일 수 있다는 모티브는 비단 이 소설에서만 나온 게 아니라 원래 일본 토속 신앙으로 존재하는 모양입니다. 불꽃의 미라쥬에도 나오고 말이죠(…).
(*나중에 수정 : 전혀 아니었음)
일본 신화/토속신앙을 잘 아는 게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숫자 4가 죽을 死와 같은 발음이라 기피된다는 것은 한자 문화권에 공통된 현상이고요.
시코쿠가 원래 四國이 맞는데 발음이 저래서 死國이라는 신앙이 생긴 건지,
아니면 죽은 자들의 나라라는 뜻이 맞는데 불길해서 四國이 된 건지, 궁금하지만… 귀찮아서 안 찾을 거고.

이 작품은 순전히 소녀 유령(?)이 나오는 호러로도 읽을 수 있겠고,
四國->死國(죽은 자와 산 자가 공존하는)으로 변한다는 환상 소설로도 읽을 수 있겠고,
영화에서는 안 나왔지만 주인공 하나코가 갖고 있었던,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껍데기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껍질 깨려 했는데 안 깨졌어!!’로 끝나는, 성장물이 되려다 만 소설(;;)로도 읽을 수 있을 듯.

…까지가 소설 읽기 시작할 때 나중에 포스팅해야지 했던 범위입니다.

***

이게 실은 원작 소설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어서, 교보에 원서 재고가 있으면 사려고 했는데 없길래 일단 번역본을 읽어보고 괜찮으면 원서 사자 싶어서 번역본으로 읽었습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가 아니면 늘 있는 일입니다만…

번역 후기 읽고 독후감이 완전 뒤집혔어요.

중1 시절의 번역자가, 당시 초6이었던 동생이 ‘인간은 죽으면 어디로 갈까?’라는 애매한 질문을 하기에 마침 덥고 짜증도 나고 해서 ‘죽어보면 알겠지’라고 대답했더니 그 한 달 후 진짜로 동생이 강에 빠져 죽었다는 에피소드를 실으셨습니다.
………
………….
………………에. 레알?

….아니라는 말이 없는 걸 보니 진짜인 모양입니다.

….
…….
…….……어쩌라고?

아니 어쩌라고랄까… 현실의 죽음에 대한 글을 실은 의도가 뭐죠?
‘정말로 인간은 죽으면 어디로 갈까요~’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으면, ‘노환으로 돌아가신 할머니 장례식 때 울면서, 인간은 죽으면 어디로 갈까 생각했습니다’ 정도로 끝낼 수는 없었나요?

‘내가 죽어보면 알겠지라고 했더니’ ‘초 6’인 ‘친동생’이 ‘강에 빠져 죽었다’. 입니다.
본인은 물론 옛날 일이라 이미 아무런 슬픔도 뭣도 느끼지 못하실지는 몰라도(나라면 평생 완전히는 소화 못 시킬 거 같지만),
환상 소설 읽고 나른한 독후감을 갖고 있던 독자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진짜 죽음이 들이대진 겁니다. 나른하고 뭐고 없습니다. 오히려 마구마구 짜증이 나는데요!? 제가 왜 역자의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알아야 하는 거죠? 역자의 ‘인간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라는 의문에 이런 식으로 공감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짜증을 내고는 싶은데 이게 또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한 거니까 짜증을 내는 것에 조심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 사실이 짜증을 더 불러오기도 하고 말이죠!? 나만 이런가요??
타인의 가족의 죽음에 대한 에피소드를 제가 멋대로 옮겨도 되나 싶기도 한데 본인이 공식 출판물에 실으신 거니까 제가 떠벌여도 괜찮다는 거겠죠!?

역자후기라든가, 해설이라든가, 개중엔 작품이 쓰인 당시의 시대 상황이라든가 작가 상황이라든가 알려주는 일이 많아서, 그게 작품 해석에 도움이 된다면- 하고 웬만하면 읽는 편이지만…
독후감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역자후기는… 민폐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편집부, 말려야한다는 생각은 못 한 건가요.. 아니 워낙 유명한 번역자니 못 말린 건가..

이 사람 번역 자체는 싫어하지 않아요. ‘人を信じる’의 人는 ‘사람’보다 ‘남, 타인’으로 번역되는 게 더 내 취향인데- 정도 밖에 느끼지 않았어요.
…그래도 제가 번역 후기를 읽고 분노하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예고 없는 네타바레 빼고)
앞으로 이 사람 번역후기는 절대! Never! 읽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독후감이었습니다…. 하아. 글 읽는 사람이 어떤 심정이 될지 상상 못 하는 건가;;
(하지만 이 사람이랑 권영주 씨랑 늘 헷갈린단 말이지)

p.s: 그러고보니 고양이 여행 리포트 때도 번역 후기가 ‘아리카와 히로는 좋은 작가인데 그 동안 다른 출판사에서 잘 못 해서 안 팔렸다’라는 뉘앙스여서 분노했었는데… 왜 저라는 인간은 과거에서 아무 것도 못 배우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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