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 위의 마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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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만에 부활한 흑색의 마왕 ‘가인’. 대기에 마나가 사라져 위기에 처한 가인은 마치 운명같이 한명의 소녀와 만난다. 순백의 소녀, ‘에리스’는 자신을 ‘작가’라 지칭하며 마왕의 재기를 돕는 대신, 슬럼프 탈출을 위한 새로운 신작 소설의 집필을 도우라고 말한다.
에리스가 ‘작가’라는 사실과 가인이 ‘마왕’이라는 비밀을 서로 숨기며 카토르바슈 신성학원에서 소설 기획을 시작한 두 사람. 하지만 그 집필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는데…….

라이트노벨 전문 라이터 ‘크로이츠’ 최지인이 전하는, 잔잔한 원고지 위의 감동 판타지.

이 블로그에 올 만한 사람이면 작가가 누군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작가의 네임 밸류와 그 화제성만으로도 포스팅 하나는 때울 수 있겠다 싶어서 슥 읽었습니다. 초회 한정 부록인 캐릭터 카드 일러스트가 예뻤다는 것도 있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거의 없다 하더라도 아무래도 과대평가나 평가절하하기 쉽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저는 후자네요. 훌륭한 평론가=훌륭한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말이죠.
그래도 굳이,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데뷔작이라는 것을 고려해서 제 평가는 10점 만점에 8점. 권수 끝에 숫자가 없어서 단권인가 했는데 숫자 안 붙이는 게 요즘 시드 노벨 추세인가요? 하여간 데뷔작으로서도, 단권으로서도 정리가 깔끔하게 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저는 단권작품보다 시리즈물을 좋아합니다.)


(이후 네타바레가 있을 수 있으므로 안 읽으신 분들은 피해주세요)

1. 남자주인공
일단 시드 노벨측에서 공개한 마왕의 일러스트.
선이 가는 흑발의 미소년. 옷 디자인이 어딘가 가쿠란삘. 까만 옷. 까만 망토. 마왕.
를르슈다….

거기에 비해 여자주인공과 학생회장은, 아, 예쁘네, 정도의 감상 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제가 남자캐릭터를 편애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요, 작가 블로그에도 남자 캐릭터가 제일 모에하다는 말도 있었고요.

하지만, 과연 그런가요?
확실히 여자캐릭터들은 어느정도 정형화되었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데레, 작고 귀엽지만 가끔 날카로운 룸메이트. 어벙하지만 편집 능력은 높은 안경 선배. 멍하지만 영감이 있는 선배. 긴 머리에 엄격한 학생회장(173cm에 54kg라니 말이 돼?). 비밀의 백합 정원.

그에 비해 마왕 쪽은 지금까지 제가 읽었던 캐릭터와는 그다지 겹쳐보이진 않았어요.
그렇다고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정형화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니까.
몰개성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비슷한 캐릭터를 굳이 따지자면 있기는 한데(나중에 말하겠지만)..

처음에 나오는, 마왕은 처음부터 마왕이었던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 마왕이 될 이유를 갖게 되어 비로소 마왕이 된다- 라는 문장도 좋았고요. 의외로 호인에 성실하다-라는 성격도 좋았는데, 딱 하나 마음에 안 든 것.

왜 이리 밋밋해?

앞에서도 나오지요. 평범한 인간이 육체는 없이 의식만 남은 채로 400년이나 지난다면 이미 발광했었을 것이다- 라고. 마왕이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도 너무 오래 전의 일이기 때문에 첫사랑의 비극도 상당히 풍화되어, 마왕이 된 목적만 무미건조하게 남은 상태로 부활.

그런데도 그 긴 세월 마왕과 의식체로서만 버티었다는 건.. 마왕으로 살아간 건 어느 정도 납득은 하겠지만, 의식체로서, 육체를 만들기 위해 바둥거릴까? 싶었어요.

바둥거린 건 바둥거렸다 치고, 결국 마왕이라도 인격체였기 때문에 소녀를 보고 도와주었을 정도니까, 그럼 좀 더.. 400년을 버티게 했을만한 성격이었거나, 계기가 있었으면 좋았을 생각이 들어습니다.

비슷한 성격의, 천년동안 세계를 멸망시킬까 말까 고민한 모 라이트노벨의 마왕은, 차라리 건드리기만 해도 세계를 멸망시키라고 외치는 허무색의 연인이라도 줄곧 곁에(안에?) 있었으니까요.
그러고보면 둘이 마왕이 된 계기도 어느정도 비슷하네요. 흐음.

하여간, 처음 일러스트 보았을 때, 배경이 어두워서 그런지 모니터로 보았을 때보다 인상이 약했던 것도 있어서, 제 안에서 이 아이는 인상이 약한 마왕이었습니다. 이름도 ‘가인’이라니 밋밋해!
차라리 에리스 쪽이 강했지요. 구원을 받는 것도 에리스 쪽이 강하고.


2. 세계관
마법과 용이 등장하는 중세유럽풍 판타지. 그래도 시민문화가 형성되어 있을 정도로는 발달한 세계. 원고지와 마법에 대한 설정은 참신했습니다. 그나저나 ‘한국적인 라이트노벨’ 노선은 안 타시는군요.. 랄까 저는 아직까지 한국적인 라이트노벨이라는 게 뭔지 감도 안 와서..(머엉)
국가 정책에 의해 망해가는 기숙사 학교라는 건 묘하게 현실적이네요. 일단 요즘의 라노베에선 볼 수 없는 참신한 설정;

3. 스토리
Boy meets girl, 백합, 기숙사제 여학원 등 다양한 요소를 계산적으로 잘 배치하셨더군요. 주인공 둘이 작가와 편집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까지 합해, 작가 본인의 강점을 잘 살렸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약간 아쉬운 건 연애요소(러브코메 말고)가 적다는 것. 아무래도 성장과 연애를 단권에 다 넣는다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요. 그래도 ‘첫사랑과 닮았어’ 드립까지 쳤는데…!
만약 2권이 나온다면 연애를 기대하면 좋겠지만… 이런 결말을 내놓고 2권 나오는 건 글쎄, 좀 무리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 그건 봐야 아는 거니.

4. 문체
사실 책 읽을 때 휘릭휘릭 넘기는 편이라 별로 신경 안 쓰는 부분인데, 그래도 처음에는 나름 꼼꼼히 읽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무난하다고 느꼈는데… 제 기분 탓인가요? 현재진행형이 좀 많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거슬린다는 건 아니고, 제 자신이 일본번역체에 물들었다고 강하게 의식해서 그렇게 느낀 것일지 모르겠지만요. 으음.. 뷁


***

하여간, 거두절미하고 데뷔작으로서는 수작이 아니었나 싶어요. 한마디 더 붙이자면 캐릭터소설보다는 성장소설의 성격이 더 강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양립할 수 있는 거 아니냐 하면 할 말은 없고(..).
시리즈물이건 아예 다른 작품이건 계속 작가활동 하실 모양이고, 이 작품은 네임 밸류 때문에 어느 정도 판매량은 달성할테니까요. 다음 작품도 힘내서 쓰시길 바랍니다.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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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절하해서 8/10이면 상당히 후한 점수인 듯 한데요. ^^;;
전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어차피 다들 칭찬일 테니, 좀 박하게 평가하는 글을 찾아서 읽어본 정도입니다만…
기본적으로 호의적인 평가 내에서 아쉬움을 드러내는 게 많은 듯 합니다.
아마 작가가 평소에 쓰는 글 때문에 기대치가 꽤 높게 잡혀있는 게 큰 듯 하더군요.
어딘가에서 “평작과 수작 사이”라는 평가가 있는데, 대부분의 평가는 이쯤에 위치하는 듯 합니다.
(“잘 쓰긴 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단 조금…” 이라는 느낌이려나요)
물론 그 ‘평작’과 ‘수작’은 각자 기준이 다르겠습니다만.

쓰신 글로 생각하면, 작가 자신이 읽었던 다른 글들 영향을 강하게 받았나 보군요.
일본소설의 문장 느낌이 강하다면 특히 그런 듯 싶습니다.
‘한국적 라이트노블’에 집착하지 않은 건 오히려 잘 선택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잘 모르는 도박보다는 잘 알고 안정적인 노선”으로 결정한 게 아닐까요.
저야 작가 당사자가 아니니 결국 추측일 뿐입니다만.

평론가와 작가의 관계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좋은 평론가가 좋은 작가이지 않을 수도 있다”가 아니라, “좋은 평론가는 작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입니다.
평론가가 평을 하는 기준이 자신이 ‘독자’라는 위치에 있는 것을 전제로, 독자의 시점에서 그 작품을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평론자가 작가의 입장에서 평을 하면, 그건 작가에 대한 변명이고 작가의 사정을 독자에게 설명하는 대변인이라는 입장일 뿐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평론가는 작가와 가깝게 지내고 작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작가 그 자체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평론가로 활동하려고 한다면 자신의 ‘독자’라는 입장과 ‘작가’라는 입장을 분명히 분리해야겠지요.
어쨌거나, 이건 그저 제 이상론일 뿐이지요.
남의 글을 많이 읽다보니 자기 글 쓰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심리일 테고.
이제까지 해 놓은 말들이 있으니, 그만큼 자기 글에 대한 책임이 무서워서라도 알아서 좋은 작품 쓰게 되는 요인이 될 수도 있겠지요.

p.s.
읽지 않은 글, 보지 않은 영화 이야기 하는 게 많아졌습니다.
이것도 남들은 이렇게 평가하고 이렇게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서 쓰는 덧글입니다.
나중에 직접 보고 감상 쓸 기회가 있어야 할 텐데요… __;;

음, 그런가요?;;;; 그, 그럼 7점?
재미가 있고없고의 문제를 떠나, 일단 준비를 많이 한 작품이라는 게 느껴져서요.
라이트노벨인 인상은 재미있는 것이 제일 중요하긴 하지만요.

이제 평론가로서의 활동은 접으실 모양이니, 작가로서 얼마나 성장하실지가 문제네요. 잘 안 되어서 다시 평론가가 되는 것도 이상하니.. 본인으로서는 큰 모험일테고.

천천히 사서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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