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이른 아침, 나와 사케카와는 목소리를 갖지 않은 총명한 붉은 눈 공주와 셋이서 보트에 타고 있었다. 목적지인 저택에서, 티벳에서, 나이아가라에서. 우리들의 의식은 혼선되고, 시점은 시공을 오고가고, 이윽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이것은 환상소설인가 SF인가? 백년 시리즈 최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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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차례로, 만나는 사람의 몸이 되어서 생각하는 거니까, 이런 이상야릇한 일이 벌어지는 거야. 일단 다른 사람의 의식이 혼입하면, 원래 있던 인간이 시공에서 괴리되어버려. 일종의 패러렐 월드랄까, 인격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덮어씌워지는 거니까, 아무래도 단신으로는 있을 수 없게 돼. 말하자면, 이건 고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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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히로시의 백년 시리즈의 3번째 작품이자 최종권.
1, 2권이 2110년대의 미치루 & 워커론 로이디의 이야기였고, 이번은 시대를 거슬러-정확히는 안 나와있지만 자동차가 나오니까 20이나 21세기-올라온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미치루와 워커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초반부는 출판사 소개들대로, 화자인 ‘나’와, 성대로 소리는 낼 수 없지만 입모양으로 의사 전달을 하는 총명한 ‘붉은 눈 공주(아카메히메)’,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아카메히메에게 심취해있는 소설가 사케카와와 셋이서, 아카메히메의 숙부라는 인물의 저택을 찾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지질학자인 것 같은 아카메히메의 숙부 마타이는, ‘사막 위를 흐르는 강’의 이야기를 하면서 유속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대화를 진행합니다. 뭐 모리 히로시 작품이니까요.
그리고 대화를 끝낸 후 침실을 안내받은 ‘나’와 사케카와는, 그 동안의 안부를 물으면서 아카메히메를 만났던 이야기를 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우연히 아카메히메를 만나서, 토론토까지 차로 태워다줬던 사케카와.
티벳에 학회차 나와있다가, 우연히 아카메히메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함께 ‘녹색 눈 왕자’로 불리는 인물의 궁전까지 찾아간 ‘나’.
앞의 두 권이 일단 살인사건을 다룬 내용이었으니까, 이번에도 살인사건이려니- 하고 읽고 있었는데, ‘나’와 아카메히메와 녹색 눈 왕자가 녹색 눈 왕자의 부왕을 만나는 장면부터 이야기가 이상해지기 시작합니다.
손님으로서 궁을 찾아간 내가 어느샌가 녹색 눈 왕자의 부왕의 시점이 되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그러다가 다시 시점이 사케카와로 바뀌었다가, 사케카와가 태워다 준 여성의 시점이 되었다가, 그 여성이 죽인 다른 여성의 시점이 되었다가.
3인칭 전지자 시점이나, 1인칭 관찰자 시점이라는 뜻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명확한 문장 상의 구분 없이 어느샌가 다른 인물로 바뀝니다. ‘나’라는 의식이 여러 인물의 육체를 뛰어다니는 거죠.
솔직히 말해 지루할 수도 있지만(결국 살인사건도 안 나오고), 그만큼 환상 소설의 성격을 짙게 띄기 때문에, 환상 소설 읽는다는 생각으로 읽게 되더라구요.
중간에 이런 의식의 혼선이 어째서 일어나는 것인가?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을 시도하려는 모습도 보이고요(약간).
(1, 2, 3권 네타바레가 될 만한 내용을 하얀 글자 처리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일이 아니니까요 ^^; 과학적인 설명은 무리고,
– 결국은 우리의 몸은 단말기일 뿐이고, 실은 의식은 뇌가 아니라 하늘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닌가.
– 하늘 너머에서 육체를 조종하는 네트워크에 혼선이 와서 이런 것은 아닌가.
– 그럼 그 네트워크를 관장하는 것은 누구? 신?
– 신이란 존재에 의미는 있는 것일까?
– 그렇자면 인간은 신의 인형일까.
– 어느샌가 인간들 사이에 인형이 섞여서 인간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음
– 하지만 죽어서 시체를 조사해보지 않으면 그것이 인간인지 인형인지 알 수 없다
– 인형 자신도 스스로가 인형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 그렇다면 인간과 인형이 다를 것이 있을까.
…라는, 특히 후반부에 와서 2권과 연관되는 내용이 나와서, 아아, 이래서 백년 시리즈의 최종작, 하지만 제대로 말하자면 프리퀼이구나, 싶었습니다.
실은 이 작품은 시키 시리즈와 고단샤 타이가에 연재중인 W 시리즈를 같이 읽어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는 하던데, 저는 시키 시리즈는 안 읽었지만(언젠가 읽기는 해야겠구나 싶지만), 저런 사태를 불러일으킨 것이 시키 박사라는 것만 대충 알겠더라구요.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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