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네고로지

딱히 심한 알러지는 없지만 꽃가루 날리는 때가 오면 결막염/비염이 옵니다.
비염은 마스크를 쓰면 된다지만 결막염은 어떻게도 안 되는데, 이 맘때는 괜찮으려니 했는데 산에 몇 시간이고 있으니 슬슬 결막이 가렵더라구요.
게다가 등산을 하고 있는데 입까지 마스크를 하고 있자니 너무 답답하고.
그래서 건너편에서 오는 사람이 없을 때만 마스크로 코만 가리고 입은 안 덮은 상태로 눈을 감고 걷는다는(아스팔트길이고, 차가 오면 소리가 들리니까) 기행을 하기 시작했는데 시로미네지에서 나오다가 인도 한복판에 뱀이 나와있는 것을 목격하고 눈은 뜨고 걸었습니다;

1시 15분 정도에 중간지점인 一本松에 도착했고, 이쯤부터 제법 힘듭니다. 점심이라도 먹으면 좋겠는데 이 구간에 식당은 한 곳뿐이니 어쩔 수 없이 계속 걷습니다.

一本松를 지나가니 나무들이 예뻐지기 시작함
이 날 본 제일 예뻤던 벚나무… 수양벚꽃
웅장하다는 생각 밖에
이 수양벚나무는 암만 봐도 사람 손을 탄 거 같은데? 싶었는데 다시 보니 삐죽삐죽 튀어나와있네요. 이 때 얼마나 힘들었으면 뇌가 착각을;;
여튼 이 주위에 공중화장실도 식당お食事喫茶 みち草도 있습니다.
2시에 겨우 점심을 먹습니다.
우동만 파는 건 아니지만 니쿠우동을 시킵니다(단백질!).
여기에서 한숨을 돌리다 본, 벽에 걸려있는 목적지인 네고로지의 사진(이건 제가 찍은 거지만).
매우 계단이다
…약간 각오는 하고 출발합니다.
그런데 또 여기에서 착각을 한 것이, 이 가게에서 네고로지까지는 금방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먼 데다(40분 걸음) 경사가 오르락내리락.
점심을 먹고 충전을 해서 다시 걷기 시작할 무렵에는 괜찮았는데, 거의 다 온 줄 알았던 게(=희망이 보이는 거 같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이 구간이 제법 힘들었구요…
막상 절에 도착해서 계단 올라가는 건, 계단이 오묘하게 중간 중간 끊어져 있어서 보기보단 덜 힘들었어요.(아니면 러너스하이가 왔던 걸지도?)

*

82번 네고로지根香寺는 쿠카이가 처음 터를 정하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세운 건 엔친이라 그런지 진언종이 아니라 천태종의 사찰입니다.
본존은 여기도 천수관세음보살이고요.

산문이었던 거 같은데 홈피에 경내 도면이 없다.. 화려한? 현판
이곳은 경당보다 절 전체에 단풍을 예쁘게 심은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파란 단풍이 이 정도면 가을에는 정말 예쁠 듯.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그리고 이곳에 도착할 때 3만보. 2시 50분.
이제 고시키다이를 하산해야 하는데, 원래 계획대로라면 8km를 걸어 JR기나시鬼無역으로 가서 JR을 타고 타카마츠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나시역 근처에는 모모타로 이야기 초반의 복숭아가 떠내려온 강가도 있다고 하고요… 하지만 8km라니 이 시점에서는 너무 질리더라구요.
그런데 구글맵을 보니, 북쪽으로 4km 열심히 걸어내려가면 10분 후에 오는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다고 뜹니다! 그럼 당연히 4km 걷는 쪽을 택해야죠.
세토내해를 바라보며 열심히 내려옵니다.. 버스 놓치면 안 돼..
이 중력에 몸을 맡기며(?) 내려오는 길이 제일 힘들었네요. 이 때 정말 차 렌트해서 다니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또는 중력에 진짜로 몸을 맡겨서 굴러내려가는 상상도(남이 하는 말은 들어봤지만 내가 생각한 건 처음이다)
후덜덜한 버스 시간표.
다행히 4시 13분 버스 오기 10분 전에 정류장에 도착. 여기에서 20여분을 달려 타카마츠역까지 돌아갔습니다. 560엔.
운전사 뒷자석에 앉아 졸면서 가는데, ‘오헨로’라 쓰여있는 자유롭게 가져가라는 안내서가 있어서 꺼냈더니 버스회사에서 운영하는 88사찰 순례 투어더라구요.

원래 가이드 투어류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2주에 걸쳐 88사찰을 다 도는 일정을 내기 힘들어서 처음부터 가이드 투어를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버스 회사에서 운영하는 건 1일 단위로 사찰 몇 개만 끊어서 받는 형식이라 날자만 맞으면 할만할 듯. 특히 12번 사찰 같은 난코스라면 더더욱.
카가와의 버스 회사인 코토덴에서 운영하는 투어(Link)인데 그렇다면 1일 여행을 기획한 회사가 더 있을 듯. 다음에 시코쿠 갈 때 알아봐야겠어요.

그리고 5시에 호텔에 들어와서 쉬다가 8시즈음 저녁 먹으러 나갔다 들어오니 4만보가이 날 처음으로 무릎보호대를 하고 다녀서 무릎은 괜찮았는데, 난생 처음 발가락의 지면에 닿는 부위에 물집이 잡혔어요 ㅇㅅㅇ

4 Comments

Add Yours →

와, 사진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네요. 사만보의 이면에는 이런 험난한 여정이 있었네요. 진짜 순례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코스로군요. 고생하셨어요. 덕분에 사진으로나마 웅장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스크림 파는 곳도 있었으면 딱 좋을텐데 말이죠. 잘 팔릴 것 같은데 ㅎㅎㅎ

우동 먹은 곳에서 하드도 팔았던 거 같아요.
그런데 이 코스는 다들 차나 오토바이 타고 지나가는 게 대부분이라 가게 수요가 적은 느낌이었습니다…ㅠㅠ

계단사진+네고로지라고 해서 한자생각은 자는것처럼 굴러서 내려가란 뜻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클릭했다가 중간 내용에서 쿨럭하고.. (ㅠㅠ)
시코쿠 88개소 순례의 유명세에 비해 교통편이 불편한걸 보니 정말 순례길이네요..

그래도 헨로코로가시(저는 헨로殺..로 읽었던;)가 한 일곱군데라 힘든 거고 나머지는 대충 시가지 안에 몰려있는 형태라 저곳만 버스 투어를 쓰고 나머지는 대중교통을 적절히 돌려다니면 될 것 같습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