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나나카마도와 일곱 명의 불쌍한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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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카와무라 나나카마도(七竈)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아름답게 태어나버렸다.
어머니가 음란하면 딸은 아름답게 태어난다는 바보 같은 가설을 제창한 것은 친우 유키카제(雪風)지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맞는 건 아니지만 틀리지도 않다. 나는 어머니의 음란함 덕에 비상히 주눅든 소녀시대를 지낼 수 밖에 없었다. 남자들은 내 얼굴을, 몸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무언가가 어느새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느껴, 나는 몸을 움츠린다. 어른인 남자들이 뚫어지게 바라볼 때마다 나는 분노를 느낀다. 어머니에게. 세계에게.
남자들 따위 망해버려라. 불어라, 멸망의 바람.

NO. 6의 요기에 쏘여서, 남X남의 요기는 남X녀의 요기로 물리친다! 라는 생각에 집어든 책입니다(…).

사쿠라바 카즈키작. 야성시대 2005년 10월호부터 2006년 5월호까지 연재되었던 작품으로, 2006년 양장본, 2009년 문고본으로 출판되었지요. 원래 경제/공간적 사정으로 하드커버는 안 산다는 주의입니다만, 이건 워낙 표지가 예뻐서 샀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에야 읽었다는 ㄷㄷㄷ (중간에 문고본도 나오고, 하드커버가 북오프에 떠서 피눈물도 흘린…)

홋카이도의 작은 시골 마을 아사히카와를 배경으로, 소녀 나나카마도와 주변 인물들의 사랑과 불행을 그린 작품.. 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나나카마도의 어머니인 카와무라 유나는 어느 평범한 아침, 갑자기 음란한 여자가 됩니다. 한 달도 안 되는 사이 일곱 명의 남자와 관계를 맺지요. 원래 유나는 ‘워낙 단단해서 일곱 번 아궁이(竈)에 넣어야 겨우 재가 된다는 마가목(나나카마도) 같이, 일곱 명의 남자와 자면 내 사랑도 재가 될까’란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만.. 재가 되지는 못하고, 대신 임신을 하지요. 그리고 태어난 딸에게 나나카마도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나나카마도는 그런 출생성분 때문에 주눅든 소녀시대를 보냅니다. 유일한 친구는 소년 유키카제. 하지만 둘은 고 2가 된 후 급격히 닮기 시작하고, 어렴풋이 서로의 관계를 깨닫게 됩니다.


“……유키카제.”
“나나카마도.”
유키카제가 겨우, 나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그렇게”
말해줘.
좀 더 말해줘. 그 말을. 좀 더.
“네가 그렇게, 아름답게, 태어나버린 건”
“예, 예.”
“네가 그렇게 아름답게 태어나버린 건”
“예, 예.”
“어머니가 음란했기 때문이야.”
“예……”
초자연적인 이유로 해줘.
이것은 결코,
유전 같은 게.
아니야.


창유리를 다시, 마가목의 붉은 열매가 두드렸다. 선생님은 그것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마가목의 열매는”이라고 말하기 시작해 나는 놀라서 “네?”라고 대답을 했다.
선생님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언제나 이렇다.
“마가목의 열매는, 딱딱하고, 먹으면 쓴 것도 있다고 합니다. 종류에 따라서 다르지만.”
“하아.”
“가을이 되어 붉은 열매를 맺고 유혹하지만, 뭣보다 딱딱한 데다, 써서, 새도 먹지 않고 남겨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겨울이 되어도 붉은 열매를 맺은 채,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겁니다.”
그저 바람에.
“하아.”
“설국의 나무니까, 그렇게 되면 붉은 열매에 묵직하게 눈이 쌓여서, 빨강과 흰색으로,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대로 썩는 운명이지만, 어쨌건 계속 아름답습니다.”
썩는다.
“하아……”
눈이 쌓인다.
“이상.”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총에 맞은 사람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보았다.
버스가 천천히 흔들렸다.

마을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당사자와 그 가족들은 눈치챈 나나카마도와 유키카제의 관계.
더 이상 이 마을에-유키카제의 곁에 있을 수 없다고 깨닫는 나나카마도.
나나카마도의 어머니 유나.
나나카마도와 유키카제의 아버지.
친구가 낳은 자기 남편의 딸을 바라보는 유키카제의 어머니.
나나카마도가 자신의 딸이라고 믿었던 남자.
유나가 정말로 사랑했던 남자.
그 남자의 아내.
어른이 되어버린 유키카제.

…불쌍한 어른들이란 이렇게 일곱 명일까요? 홋카이도의 겨울. 고풍적인 나나카마도의 말투 등이 어울려서 작품 전반적으로 적막한 분위기입니다. 같은 근친물(..)이지만 비 냄새로 끈적거렸던 ‘내 남자’와는 영 딴판이네요. 개인적으로는 ‘나나카마도’ 쪽이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이 작품은 수상하는 일이 없이 묻혀버려서 아쉽네요.

이것으로 사두었던 사쿠라바 카즈키의 소설은 다 읽었지만, 다음에 기회나면 ‘패밀리 포트레이트’ ‘블루 스카이’ ‘도덕이라는 이름의 소년’을 사 볼 생각입니다. 이 작가도 좀처럼 버리질 못하네요.

4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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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작품이었어요! 노블마인에서 조금만 사쿠라바 가즈키의 소설이 많이 팔렸다면 이것도 계약되어 출판되었을 텐데.. 너무 아쉽습니다~
역시 원서로 봐야 할 운명인걸까요?
이 작품도 기존 사쿠라바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소녀가 주인공인 듯 하군요 ^^
표지도 참 괜찮네요~~~

삼끼님 글 읽고 일본 갔을 때 사서 반 년 만에 드디어 다 읽었네요^.^; 저도 이 작품이 맘에 들더라구요. 한국에 정발이 안 된 게 아쉬워요.

같은 근친이어도 내남자랑 달리 되게 가슴 아프고 깔끔하게 관계를 끊어버리네요. 그것도 좋았지만요^^; 뒤에 나오는 고져스도 좋았어요.
처음에 고식을 읽다가 사쿠라바 카즈키 다른 작품들을 보게 된 건데 진짜 고식이랑은 완성도가 딴판이네요. 고식은 어설픈 추리도 그렇고 내용도 어정쩡한 게 많았는데, 사쿠라바 카즈키의 문예작들은 가져다 주는 여운의 크기가 차이 나는 것 같아요. 초기작은 좀 지뢰가 많은 것 같구요=ㅂ=;;;

하드커버 표지 진짜 이쁘네요. 문고판 표지는 썰렁하게 풍경화-_-ㅠ 저건 작중에 나온 유키카제의 빨간 머플러군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
문고본으로 사신 모양이네요. 고져스란 것은 아마 문고본에만 실려있는 단편인 듯?

이 포스팅하고 몇 달 후에 사쿠라바 카즈키의 제철천사가 발매되길래 오옷! 했는데, 솔직히 그 작품도 잘 팔렸을 거 같진 않아서; 차라리 이 소설로 내주지 싶었던 기억이 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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