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의 한마디

나는 2007년도에 시험을 보지만, 2010년부터 국가 의사 시험에 실습 시험이 도입된다.
뭐, 병을 진단하기 보다 모의 환자를 데려다 놓고 주소를 시작으로 과거병력, 가족력, 진찰 등 접근 방식을 채점한다는 것 같은데..
물론 3번 떨어질 것 아니면 나와는 관련이 없지만,
CPX(풀텀은 모름;)라고 해서, 2010년에 대비한 시험 수준 등을 결정하기 위해, 시험 차원으로 전국 의대를 순회하며 치르게끔 시키는 게 있다.
(그리고 나는 시험 전 3일까지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음)

한 문제당 12분, ‘어디가 아프셔서 오셨어요?’를 시작해서 묻고 진찰하고 설명하고 계획짜고… 라고 하면 시간이 많이 부족할 것 같지만 사실 학생 입장에서는 할 말 하고 나면 따로 할 말도 없고 뻘쭘.
뭐 하여간, 우리 학교는 5문제가 나왔고, 모의 환자들은 과연 연기 학원 같은 데에서 데려왔는지 리얼했는데,

그 중에 이런 환자가 있었다.
나이는 57세, 남자, 3년 전 외치핵을 앓고 좌욕과 약물로 치료를 하다가 최근 혈변이 나와서 내원.. 라는 문제.
모의 환자를 만난 뒤 이것저것 더 캐내면 최근 변비가 심했고, 변 굵기가 가늘었고, 직장 검사 하면 항문 상방 7cm에 경계가 불규칙한 덩어리가 만져진다… 라는 정보가 나오고,
더 캐면 가족중에 암 환자는 없었고, 정기 대장 내시경 안 받았고, (그러고보니 음주랑 흡연력 안 물었다;)

뭐 대충 이랬는데, 실제로는 어떨지 몰라도 문제에서 저 위에 굵은 글씨인 정보가 모이고 나면 정답은 십중팔구 직장암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내시경&조직검사->(대장조영술)->CT->수술, 대강 이런 식이 되는지라 모의환자에게 ‘덩어리가 양성 종양인지 악성 종양인지 알아보기 위해 조직 검사를 하겠습니다’라고 설명했더니,

모의환자도 나이에 걸맞는 할아버지였는데, 어떤 캐릭터인지는 몰라도 연변 말투 같은 기묘한 말씨를 써가며 느릿느릿~~~ 말하는 덕에 시간을 벌어서 좋구만 하고 있던 차에
‘선생님이 암일지도 모른다고 하셔서 걱정됩니다~~ 어떤 근거로 말씀하시는 겁니까~~’하고, 별로 무섭지도 화내는 것 같지도 않은 듯한 말투고 이야기하는 거다.

자, 어떡하냐.

마음 속으로는 ‘히익~ 죄송해요죄송해요(후르바의 리츠버전)’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일단 연기인 거니까 미안하다고 하고 싶지는 않고, 실제였다고 해도 섣불리 미안하다고, 암이 아닐 확률이 더 크다고 말 돌리는 것도 뭣하고,

하지만 ‘처음부터 악성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는 해둬야 하잖아’라는 보신적인 태도란 것도 있고 말이지?

그러고보면 중학생 때, 어머니가 개인 산부인과에서 ‘자궁에 혹이 있다’라는 말을 듣고 엄청 고민하신 적이 있다. 그 때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악성일지도 모른다는 말 역시 들었던 모양.
그리고 길병원에 간 결과 혹 같은 거 없다는 결과가 나와서, 지금 생각하면 자궁근종 같은 것이었겠지만…
어쨌건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어머니의 걱정이란 상당한 것이라서, 평소 별로 싸우거나 하지도 않는 집안 분위기가 상당히 썰렁했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별 생각이 없는 말이라도 의사의 한 마디란 것이 얼마나 큰 영향을 갖고 있는 것인지, 지금 생각하면 오싹.

실습 돌면서, 환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같이 실습도는 동료라든가, 무서운 교수라든가, 간호사라든가, 기사라든가..)과 지내면서 정말로 사회에 나가면 인간관계 피곤하겠다.. 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환자나 환자 가족들과 만날 때는 어떨까, 생각하게 된다. 깨끗이 나아서 웃는 상황만 있는 것도 아니고, 비합리적인 일로 보호자랑 싸우는 일도 많이 보았고(가족이 아픈데 냉정할 수 있는 보호자란 것도 없고 가정의 사정도 제각기고).

평상 생활의 나는 ‘허투루 말할 거라면 차라리 말을 하지 말자’라는 생각도 있고 해서 별로 말이 없는 성격이지만, 나중에(1년도 안 남았다;) 직접 현장에 나가게 되면 어떨런지.
참고로 현재는 환자 안 보는 과-마취나 진단방사선이나-를 생각하고 있지만서도.
(뭐니뭐니해도 웰빙! 아니 애초에 다른 사람을 돕자는 생각도, 돈 벌자는 생각도 없이, 그저 수능 성적에 걸맞는 안정직, 을 찾다 보니 걸려든 게 의대라)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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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어디든, 어떤 직종이든지 문제는 ‘인간관계’인 것 같아요-_-
아….인간관계 참…어렵죠.
정말 의사라는 직업 많은 인내와 끈기를 필요로 하는 직업인 것 같아요.
특히나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일이라.
정말 삼끼님 말씀처럼 보호자랑 싸우게 되고 법정 소송이다 뭐다 귀찮은 일에 말려들면 많이 곤란할 것 같습니다.
힘내싶쇼 ㅜ_ㅜ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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