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독서

지난 달은 정신과를 돌았습니다.
폐쇄 병동 환자분 중, 추석 연휴를 사이에 두고 갑자기 상태가 좋아지신 분이 계셨는데, 9월 27일 아침에 회진을 돌면서 보니 독서를 할 생각이신지 책을 가져오셨더군요.
그 책의 제목은… ‘채털리 부인의 사랑’.
회진을 돌던 3년차 선생님이 태연한 표정으로 “독서하시나보네요~ 그런데 왜 이 책인가요?” 라고 묻자, “전에 읽었던 게 생각나서 집었어요.” 라고 답하는 환자분. 저는 무표정하게 문가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3년차와 저는, “근데 왜 채털리 부인의 사랑?”으로 잡담을 했습니다만.. 문득 제 예전의 독서 생활이 생각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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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그러니까 초등학생 시절의 저는 제법 책을 읽는 아이였습니다.
부모님도, 교육이랄까 책에 돈을 아끼는 타입은 아니셔서, 금성 출판사의 소년소녀 세계 명작 전집이니 과학 만화 전집이니 역사 만화 전집이니 달려라 호돌이(먼나라 이웃나라 같은 류)니, 추리소설 전집이니 삼국지 전집이니, 거기에 지경사 문경사의 소녀명랑소설 같은 류도 집에 갖추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한 권도 안 남았지만.. ㅠ_ㅠ)
추리소설과 삼국지 전집만 읽었던 오빠에 비해, 저는 그 책들을 읽고 또 읽었고, 제일 좋아하는 활동이 ‘뭔가 먹으면서 책 읽는 것’이었던 나름 문학 꼬맹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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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는 사정이 달라졌네요. 방과후의 대부분의 시간을 학원에서 보내게 되면서, 영어, 수학 공부만 하는 나날들이 계속되었으니까.
그나마 자기 직전의 자유시간이 있었습니다만, 중학 1학년 11월의 어느 추운 날부터 만화책에 손을 대기 시작해서(관련 포스팅: 갑자기 떠오른 옛날 생각) 더더욱 읽지 않았죠.

제가 중학생 때 독서를 했던 것은, 얄궂게도 중 3의 인천시 학력 경시대회 준비기간이었습니다.
당시 교장선생님이 뭘 기대하셨는지, 경시대회 나가는 학생들을 하루종일, 수업시간에도 수업 안 듣고 도서관에 오게 해서 공부시켰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규 수업시간이니만큼, 수학, 과학 선생님들도 수업 들어가고 나면.. 도서관에 남는 학생들은 실질적으로 ‘자율학습’이 될 수 밖에 없었죠. (그리고 실제로 수업 없는 시간이라도 선생님들 안 찾아왔고.)
몇 년간 그다지 책을 읽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런 주위에 소설책이 둘러싸인 곳에서, 감독도 없이 저에게 공부하라고 하는 쪽이 무리죠.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도서관을 일반 학생에게 공개하지 않았고,
중학생 때는 쉬는 시간에 자느라 바빠서 도서관에 신경을 안 썼던 저에게는, 그 공간은 나름 모험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당연히 선생님들 안 계실 때 이 책 저 책 건드리고 있었죠.
그 때 읽었던 책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두 작품. ‘아르센 뤼팽과 호랑이 이빨의 여자’와 ‘창궁무영’입니다.
뤼팽은.. 지금은 황금가지와 까치에서 뤼팽 전집(이라기보다 모리스 르블랑 전집)이 나와있지만, 당시 제가 구해서 읽었던 뤼팽 시리즈는 기암성이나 수정 마개, 813 정도.
그런 중에, 도서관에 (당시에 이미 품절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1990년대초에 발매된 뤼팽 전집이 있었던 겁니다! 안 읽은 게 있나 찾다가 발견한 것이 저 호랑이 이빨.
…..별로 재미있었다는 감상은 없지만.

그리고 기억에 남는 다른 책이, ‘창궁무영’입니다.
이건 무협지입니다만, 쥐꼬리만한 여자중학교 도서관에 무협지가 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한쪽 구석에 박혀있는데다가… 사이드에 붙어있는 ‘학생대출금지’.
‘대출 금지인 책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코다상은 말씀하고 계시지만..(in Missing 3)
이건 저더러 한 번 읽어보라는 거나 다름없는 거 잖아요? 당연히 읽었습니다.
몇 권 안 되는 작품이었는데(지금 검색하니 3권 완결이군요), 스토리를 요약하자면

나름 출생의 비밀을 안고 태어난 남자주인공. 벽지에서 자랐으나 몸에 흐르는 피는 어찌하지 못해 어릴 적부터 품위가 있었고, 성격이 밝아 눈동자는 마치 창궁과 같았다.
그가 웬만큼 자란 후, 사건이 일어나 그는 중원무림에 나가게 되고, 이런 저런 사연으로 주화입마(였나?)에 빠지면 색마가 되는 몸이 되어 적이고 동지고 가리지 않고 온갖 여자들을 건드린다. (안 그러면 주인공이 죽는다나? 하여간 주화입마 비스무리한 개념이었음..)
그렇게 온갖 여자들을 건드리고-나중에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여자까지 건드려서 그녀의 공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후에도- 그의 눈동자는 착한 성격을 반영하여 여전히 창궁과 같았도다- 비스무리한 내용의 문장으로 끝나는 무협지였습니다. 상당히 어이없었던 ㅡ_ㅡ;

대체 누가 이런 걸 들인 거냐 하고 보니, 당시 총각이었던 체육 선생이었습니다. 대출 카드 보니까 물론 그 선생 이름만 써 있고… 그런 책을 보려면 사비 내서 집에서 몰래 읽을 것이지 중학교(그것도 여중!) 돈을 써서 들이다니 그 선생도 상당히 어이없었죠 ㅡ_ㅡ;

참고로 이것이 처음으로 읽은 한국의 무협지였습니다. 당연히 마지막으로 읽은 한국 무협지가 되어버렸다는.. (이거 말고 제가 읽은 무협지란, 영웅문 1~3부 정도가 다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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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는, 더더욱 책을 읽지 않았죠.
당시 교내의 제 1 인기서였던 ‘법의학’ 마저 읽지 않았을 정도니까.
그러다가, 1학년인가, 여름방학때 갑자기 ‘야한 걸 읽어보자!’라는 생각이 들어 대출한 것이 그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데카메론’이었습니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독후감은, ‘성행위는 인간의 생물로서의 당연한 욕망이니-분명 닭이나 사람이나 하는 식의 문장이 있었던 것을 기억함- 인정하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데카메론은 절반-그러니까 한 50개?- 읽고 지겨워서 포기했군요.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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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궁무영이라는거.. 상당히 우스운 내용이네요-_-
고등학교때 법의학이 인기서라니..와우ㅇㅅㅇ;;
학교에서 법의학관련책을 한 남자애가 사고 그 친구들이 다 돌려가며 보는 것을 본 적은 있지만..ㅋ

아, 한 사람이 법의학책을 빌려서, 한때 교실을 굴러다니던 적이 있었습니다. 수랑님과 비슷한 경우네요.
무협지는 덕분에 손 댈 마음이 전혀 들지 않게 되었지요. 그래도 대학 입학하고 몇 달간은 한국 판타지 소설도 읽고 했는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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